미움받을 용기를 읽고

미움 받을 용기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 기시미 이치로

2018년 3월 25일

미움받을 용기? 처음 제목을 보고는 단편적으로 내용을 추정할 뿐이었다. 지금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현재의 삶에 대해 고민 하는 젊은이에게, 스스로 미움을 받아 들이라는 것인가? 라는 피상적인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나는 아직도 상식을 뒤엎는 이 책의 철학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머리가 아픈 상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책을 읽기 전에는 이미 알고 있는 생각들을 다시 정리하는 것 뿐, 뭐가 또 특별한 내용이 있을까 라는 교만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은 느끼기엔, “미움받을 용기”라는 제목은 처음 생각했던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상식으로 알고 있던 내용을 뒤엎는 내용 이라, 글로서 한번은 정리를 해야 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책을 읽고 그냥 휘발 되어 버리기에는 생각해볼 거리를 너무나 많이 던져주는 책이었다.

이 책의 중심 사상인 “아들러 심리학”은 알프레드 아들러의 사상으로, 그는 프로이트,융과 더불어 3대 심리학계의 거장으로 불린다. 아들러는 프로이트 사상과의 대립으로, 빈 정신분석학회에서 나와 “개인심리학”을 제창했다. 각 개인은 독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감명받아 수십번을 읽었던 “카네기 인간관계론”을 쓴 데일 카네기도 아들러를 향하여, 평생을 바쳐 인간과 그 잠재 능력을 연구한 위대한 심리학자라고 말한적이 있다고 한다. 많은 학자들이 아들러 심리학은 인간 이해의 진리이자 궁극적인 도달점이라 말하고 있다.

■ 첫번째 깨어진 상식 : 트라우마란 개념은 정말로 없는 것인가? 정말?

전통적인 프로이트의 심리학 관점에서는 당신이 이렇게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은 과거의 특정 불행한 일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과거의 마음의 상처가 현재의 불행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프로이드 이론에서는 과거의 원인은 당신과 무관하므로 당신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위로하고 말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자신의 불행은 어린시절 겪은 부모와의 갈등이나, 친구와의 갈등때문에 벌어진 것이며, 그 아픈 기억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현재의 내가 행동하는것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고 있다. 이를 “원인론”이라고 한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우리가 과거 사건에 의해 행동이 지배된다는 통상적인 트라우마 이론을 완전히 부정했다. 인간은 과거 경험으로 받은 충격으로, 현재의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나의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내어 스스로 합리화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은 경험일 뿐, 그것이 우리의 삶을 결정할 수는 없다. 과거의 경험에 대해 스스로 어떠한 의미를 부여했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이를 목적론이라 한다.

예를 들어, 방안에만 하루종일 틀어박혀 있는 히키코모리는 어릴때 친구들의 따돌림 떄문에(원인),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상태(결과)를 가진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목적”이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불안과 공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시 말해,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목적”이 먼저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불안과 공포와 같은 감정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밖에 나가지 않고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부모가 걱정을 해주고, 부모의 관심을 받을수 있을 뿐 아니라, 나를 조심스럽게 대해주기 떄문에, 방안에 있는 것을 스스로 “선택” 한것은 아닐까? 집 밖으로 조금만 나가면, 나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쓸모없는 사람이 될 뿐이고, 아무도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비참한 상태가 될 뿐이니, 이것을 두려워 하여, 방안에만 머무르기를 스스로 “선택”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고선 내가 이렇게 집안에만 있는 것은, 어린시절 나를 따돌렸던 상처 떄문이라고 합리화한것은 아닐까? 집안에 있는것이 내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없는 공포를 만들어 내어 스스로 집안에 갖혀있는 선택을 한것은 아닐까?…

우리는 원인론의 노예가 되어버리면 과거에 얽매인 채,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할 수가 없게 된다. 과거가 모든 것을 결정하므로, 과거의 객관적 사실은 바꿀수 없으니, 주어진 운명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란 말인가? 그러면, 동일한 원인이 있다면, 동일한 결과가 발생해야 해야 할텐데, 실제로는 동일한 상황을 겪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결과를 겪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과거의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한가지 사례를 보자. 소설가를 꿈꾸면서도 도무지 글을 한줄도 쓰지 못하는 이가 있다. 일하느라 바빠서 쓸시간이 없고, 그러다 보니 문학상에 응모할 여력도 없다는 건데, 사실은 응모하지 않음으로서 “할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남겨 두고 싶은것은 아닐까? 남의 평가를 받고 싶지도 않고, 졸작을 냈다가 낙선하게 되는 현실에 마주치고 싶지 않은것은 아닐까? 시간만 있다면, 환경만 된다면 나도 잘할수 있다는 자기 변명 속에서, 나는 능력이 있다는 “검증되지 않은 가능성” 속에서 계속 살고 싶은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런 자기 변명에서 벗어나, 실패하더라도 시도를 해야 삶이 나갈수가 있을 것이다.

왜 우리 인간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변하지 않을 핑계만 찾아서 합리화 하는 것인가. 우리는 변화하고 싶고, 현재의 삶이 조금 불편해도, 이대로 사는 것이 익숙하고, 현실의 냉정함에 맞닥들여 불안해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살고 있는 존재다. 즉, 우리는 스스로 변화하여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하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변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과거의 원인에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존재이다.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은 스스로의 의지로 바꿀수 있다. 생활양식이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다시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바꾸는 것도 가능 할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우리가 지금 당장 해야하는 것은, 지금 당장, 지금까지의 생활 양식을 버리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시도를 해야 앞으로 나아갈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들러 심리학에 대한 이해와 변화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라고도 한다.)
이 책을 읽고 내 삶을 반추해본 결과, 나역시 현재의 내 삶에서 가장 부족한것은 용기가 아닐까? 다시금 생각해봤다.

■ 두번째 상식파괴 : 인생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 정말 모든 나의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것인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아들러 심리학은 놀랍다. 통상의 관점을 깨는 철학때문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글로서 정리하기도 어렵게 느껴진다. 아들러는 인간의 행동의 많은 부분을 목적론의 관점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책 속에서 등장하는 청년은 자기 자신이 외모도 별로고, 하는 일도 도서관 사서일 뿐이라라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끼고, 성격도 나쁘다고 생각하며, 자존감이 낮은 상태이다. 청년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을 어릴때 형과 비교를 당하면서 성장했던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답을 찾고 있다. 청년은 과연 이같은 트라우마를 벗어날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고민하던 청년에게 철학자는 이같은 이야기를 한다. 청년이 이같이 자기의 단점만 보는 것은 청년 스스로 자신을 좋아하지 말자 라고 결심 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같지도 않은말이냐고 할수 있겠지만, 들어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청년은 인간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다. 남에게 부정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시당하고, 거절당하고 상처를 받는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 휘말리느니 처음부터 다른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 하는 것은 아닐까? 목적론적 사고에서 보면, 청년의 “목적”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이루려면, 자신의 단점을 찾아내어 스스로를 미워하고 인간관계에 발을 들여 놓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자신의 껍데기 안에 머물러 있으면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고, 누구에게 상처를 받더라도 핑계를 댈 수 있게 된다. 나는 이런 단점이 있으니 거절 당했다고. 나도 이런 단점만 없다면 사랑받을수 있을거라고…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 하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우주에서 혼자 사는 수밖에 없다. 고독을 느끼는 것도 사회공동체가 있고, 이러한 것들로 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다. 고독을 느끼는데도 타인이 필요하다. 만약 이세상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인간관계의 온갖 고민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으로서 몸부림치고 있는 고민, 자기 내면을 향한 고민은 부정되는 것인가? 아들러에 따르면, 내면의 고민이라는 것은 결코 존재 하지 않으며, 모두 인간관계에 비롯된 고민이라고 단언한다. !!

내면의 고민 중, 열등감에 대해서 살펴보자, 열등감이라는 것은 결국,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비교해야할 타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키가 작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열등감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내가 키가 작다는 것은 타인과의 비교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내가 키가 작아서 창피하다라는 감정이 주관적인 감정이라면, 나는 키가 작지만 대인관계에서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식으로 주관적인 평가도 가능 하다.

스스로 어떤 가치에 중심을 두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더 나아지길 바라는 보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등감이라는 감정을 가진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차피 열심히 해봤자 나같은건 할 수 없다며 포기하기도 한다. 열등감 자체는 노력과 성장을 자극하는 것이기에 나쁜것이 아니지만, 열등감을 내가 어떤것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거리 핑계거리로 삼는것은 좋지 않다.
나는 못생겨서 결혼을 할수 없다.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수 없다라는 것은 대표적인 열등 컴플렉스이다.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수 없다라고 생각 한다면, 그것은 성공할수 없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고 싶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는가? 지금 누리고 있는 즐거음 (취미를 즐기는시간)을 희생해서 까지 변하고 싶지 않고, 지금 생활양식을 바꿀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수 없다는 것은, 바꾸어 말해, 나는 학력만 높으면 크게 성공할수 있을텐데라는 주장과 같다. 이것은 나는 유능하고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것은 아닌가? 진정한 나는 우월하다라고 믿는 것일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심한 열등감이 시달리면서도 노력과 성장 같은 건전한 수단을 이용하여 보완할 용기가 없다. 그래서 열등 컴플렉스를 더는 견딜수가 없고, 못난 나를 받아들일수 없기에, 더 값싼 수단으로 보상 받고자 한다.

마치 자신이 우월한 것처럼 행동하여 거짓 우월성에 빠지는 경우가 그것이다. 가까운 예로 권위 부여를 들수 있다. 경력을 속이거나, 옷이나 장신구 등 브랜드 제품만을 사거나, 저명인사와 인맥이 있다는 식으로 나와 권위를 연결시킴으로서 마치 나라는 사람이 우월한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그 밑바닥에는 강렬한 열등감이 있는 것이다.

자기 성과를 자랑하며 뽐내고 싶어하는 사람, 과거의 영광에 매달려 걸핏하면 가장 빛나던 시절의 추억담을 늘어 놓는 사람또한 우월 컴플렉스에 빠져 있다.

정말로 자신있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는다. 열등감이 심하니까 자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누구 한 사람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을까봐 겁이나기 때문이다.

열등감에 대한 특이한 예로, 불행자랑이라는 것도 있다. 성장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불행을 마치 뽐내듯 말하는 사람이 있다. 불행함을 내세워 남보다 위에 서려한다. 그러면 스스로 남보다 우위에 있고 특별해지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림으로써 주변사람들을 걱정시키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속박하는 등, 이런 불행자랑은 자신의 열등감을 드러내놓고 무기처럼 휘두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연약함은 매우 특별한 권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갓난아이는 연약하지만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을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라는 말도 생각해 봄직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열등감, 우월성 추구를 나쁜 것으로 보고 부정해야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월성 추구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타인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제대로된 경쟁이란, 남을 밀어내고, 남을 떨어뜨려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한발 앞으로 내딛으려는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대등한 존재라는 점도 인지해야 한다. 인간관계의 중심에 경쟁이 있으면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아날수가 없다. 경쟁에서 벗어나 나 자신과의 경쟁만을 신경쓰자.

책에서 청년은 앞서 형과의 경쟁관계 속에서 부모님은 형과 자신을 비교했기 때문에, 스스로 불행한 감정속에서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형과의 관계를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았다면 형과의 관계는 어떤 존재가 되었을까? 나와 형의 관계를 분리하고, 형의 행복을 나의 패배로 여기지 않았다면 진정한 친구로서의 관계가 형성되지는 않았을까?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대방은 그저 자신을 비난하고 도발하고, 권력투쟁을 함으로써 평소 못마땅했던 나를 굴복시키려 한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 해야 할것인가? 권력 투쟁의 모습을 목격하면, 일단 회피하는 것이 좋다. 내가 이기더라도 그사람은 복수를 꿈꾸기 떄문이다. 복수가 그사람의 목적이 된다.

프로이트의 원인록에서는 비행청소년이 된아이나, 등교를 거부하는 아기가 있다면, 이를 부모가 아이를 잘못키워서 이렇게 되었다는 단순한 인과법칙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아들러의 목적론에서는 아이가 밝히지 않는 진짜 원인을 말하고 있다.

비행을 저지르고 말썽을 부리면, 부모는 곤혹스러워 어쩔줄을 몰라하고 심각하게 고민한다. 아이는 그것을 알고 문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닐까? 과거의 원인에 떠밀려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책에서는 또하나 인간관계의 중요한 팁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인간관계에서 나는 옳다라고 확신하는 순간 권력투쟁에 발을 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 그렇게 생각한 시점에서 논쟁의 초점은 주장의 타당성에서 인간관계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나는 상대에게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권력투쟁의 한 예이다. 내가 반드시 옳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내가 옳다고 믿으면 그걸로 된것이다.

우리는 진 느낌이 들더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 권력투쟁에서 물러나는것을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자세가 절대로 패배는 아니다. 우월성 추구는 타인과 경쟁하는 것은 아니기 떄문이다. 진정한 우월성 추구는 이상적인 나의 모습과 경쟁함으로서 이룰수 있다.

우리에겐 인생의 3대 과제가 있다. 일의과제. 교우의과제. 사랑의과제 가 그것이다.
우선 일의 과제에 대해 알아보자, 인생에서 일을 함에 있어서,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일과 얽힌 인간관계를 변명으로 회피하려 들지 말아야한다, 그리고, 친구와의 관계가 인생의 두번째 과제이다. 내가 변하면 주변도 달라진다. 아니, 달라질수 밖에 없다 타인이 변화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친구와의 관계에서는 관계의 거리와 깊이가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인생의 과제는 사랑의 과제이다. 인생에서 사랑의 과제에는 가족관계나 연애관계의 사랑의 과제가 있을수 있다. 우리는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떄 사랑을 진정으로 실감할수 있다고 한다. 열등감이나 우월함을 과시할 필요도 없는 평온한 상태, 바로 그 상태가 진정으로 사랑을 느끼고 있는 단계다.
우리는 이 3대 인생의 과제를 그럴듯한 변명으로

회피하려고 하는 “인생의 거짓말”에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인생의 거짓말”에 빠지지 않을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이 책의 주된 요지다. 내가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바로 타인의 과제와 자신의 과제를 분리할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 세번째 상식파괴 : 변화하기 위한 방법 – 타인의 과제를 버려라. 타인의 과제를 버리는것이 미움받을 용기다.

인간은 어떻게 해야 자유로워 질수 있는가? 우선, 아들러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위한 욕구를 부정하라고한다.

나는 사람이 늘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필요로 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해왔다. 타인에게 인정을 받으면 기분이 좋고, 인정받음으로써 나는 어떤 가치가 있다고 느끼기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 인정받기를 바래서도 안된다.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킬 필요 자체가 없다. 자신의 인생 목표가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되면,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곤두서게 되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전전긍긍하게 된다. 즉,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면서 살지말라. 그것은 나의 삶을 사는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늘 타인의 기대. 부모님의 기대, 회사에서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봐 전전 긍긍하며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제 이 책을 읽고 더이상 그럴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 개인이 원하는 삶과 회사의 요구는 일치하지 않았다. 나는 늘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회사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했었다.

우리는 타인의 과제와 나의 과제를 분리해야 한다. 모든 인간관계의 트러블은 타인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하는것 (혹은 나의 과제에 침범해 오는것) 에 의해 발생한다.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 라는 사고로 과제를 분리할수 있게 되면, 인간관계가 급격하게 달라지게 된다.

예를들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습관을 고쳐주려 한다면, 그것은 나의 과제인가 아니면 그것은 그사람의 과제인가. 나는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내려 놓지 않는다고 한들 변화시킬수도 없다. 본인의 과제임을 인지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바꿀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타인의 과제를 버려야 한다. 그것이 나의 짐을 덜고 인생을 단순하게 살수 있는 방법이리라.

요즘 가장 고민하고 있는 것인 나의 이직문제는 혹시 내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그 수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속한 집단에서 무책임하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주변사람들이 나의 퇴사나 창업에 대한 뒷말이 어떻든 그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던, 그것은 그들의 과제이지 나의 과제가 아니다. 나는 그저 내가 믿는 최선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 단순한말 하나가 인간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할수 있는 명제인듯 하다.

또한, 이 과제의 분리는 인간관계의 최종목표가 아니라 입구라는 점이다 과제의 분리로 부터 인간관계가 시작된다. 다만, 이 과제의 분리가 인간관계를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 줄수 있다.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왜 나를 싫어할까 내 행동에 뭔가 잘못되었나 고민하고 자책하는 순간도 있었다. 이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경향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경향성을 변화할수 있는 힘이 있다.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것이 내가 자유롭게 살고 있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살고 있는것이다.
나는 지금, 누구도 나를 미워하지 않으므로, 이 편안한 생활에서 안주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인생의 자유란 미움 받는 것이라는말이 충격이다.

미움받을 용기란 현재의 상황에서 타인에게 미움받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가 아니었다. 인생을 살아갈때에, 미움을 받는 삶도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는 더 큰 내용을 말하고 있다. 앞으로 내가 삶을 살아갈때에, 타인과의 관계를 벗어나, 타인과의 경쟁이 아닌 스스로와의 경쟁을 통해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겠다. 그것이 미움받는 것이던 말건 상관 없다. 책 제목을 처음에 보고 판단했던 “미움받을 용기”에 대한 생각에서 이해가 한층 넓어 졌다.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던,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고 살자. “미움 받을 용기”를 가지고 살자.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자유롭게 사는 길이다.

덧붙여, 나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시킴으로서 얻을수 있는 이점은 인생의 자유를 얻을수 있다는 점 외에도, 또 한가지가 있다. 인간관계의 주도권이 나에게로 넘어 온다는 것이다. 그를 변화시킬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변화시키고자 하면,결과의 Key는 그에게 있는 것이지만. 그를 변화시킬수는 절대로 없고, 오직 나의 변화만 가능 할 뿐이라는 생각을 하면, 주도권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가 무얼 선택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만 중요할 뿐이다. 관계의 개선을 하던지 말던지는 내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 했던 원인론과 트라우마를 부정하고, 목적론을 추구하는것, 인간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는것, 나아가 나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하는것. 모두 나의 기존 상식을 뒤 엎는 내용이었다. 이 책에서 정말 놓칠뻔했던 소중한 가치를 배울수 있었다.

네번째 상식파괴 : 세계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내가 공헌해야 하는 큰 공동체에 있다. ?

나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 하는 것이 인간관계의 출발점이라면, 인간관계의 최종 목적지는 “공동체 감각” 이라고 한다. 공동체 감각이란 타인을 경쟁상대가 아닌 친구로 여기고, 내가 있을 곳은 여기 라고 느낄수 있는 감정이다.

모든 불행의 근원은 인간관계에 있다. 거꾸로 말하면, 행복의 원천 또한 인간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돌려야 한다. 과제를 분리하지 못하고 인정욕구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내가 자유롭게 사는 증거다. 자유롭게 사는 것이 어쩌면 자기 중심적인것이 아닐까 생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만 집착하는 삶이야 말로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 중심적인 생활이 아닌가..?

자기 자신밖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본인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타인이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사람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 행동해야 되고, 내 기분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계의 중심은 내가 아니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더 큰 공동체가 중심이어야 한다.

회사라는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지위도 명함도 이름도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그가 속했던 공동체가 전부라고 오해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회사라는 작은 공동체가 아니라, 보다 큰 공동체에 여전히 속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지구, 우주라는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생각말이다. (솔직히 책에서 이 내용을 읽었을때엔, 이부분에서 많은 논쟁이 있을수 있겠다고 생각 되었다. 무작정 스스로에게 우리는 지구, 우주에 속해있다고 위로 한다고 해도 없던 소속감이 생길지 의문이었다).

조금 더 공동체 감정에 대해 살펴보자. 인간은 공동체를 떠나서 홀로 될수도 없고 홀로 살 수도 없다. 그 만큼 공동체는 중요하다. 또한 우리는 다수의 공동체에 속해져 있다. 가정에 속해 있고, 학교에 속해있고, 기업에 속해있고, 지역사회에 속해있고, 국가에 속해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 공동체 중 아주 작은 한곳에만 속해져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학교라는 공동체만이 내가 있을 유일한 공동체라고 생각했을때, 이 안에서 어떤 문제에 맞닥드리면 가정으로 도피해 그곳에 틀어박히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집안에서 폭력을 휘두를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작은 집단의 소속감을 느끼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때, 다른 공동체, 더 큰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작은 공동체에 더이상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조그마한 공동체 속에서 출구가 보이지 않을 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것은 더 큰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속한 공동체가 이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앞서 과제를 분리하면서 인간관계에서 자유를 얻고, 공동체 의식을 가지는 것이 인간관계의 최종 목적지라고 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원만한 관계를 만들수 있을까? 어떻게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될수 있을까?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수평관계라는 개념이다.

타인을 칭찬하지도 말고, 야단치지도 말라. 칭찬이나 야단은 그것은 관계를 수직적으로 바라볼때 형성되는 개념이다. 인간이 남을 칭찬할 때 그 목적은 자기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고 대등한 존재다. 칭찬이나 비난으로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말자. 이처럼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인간관계의 수직관계를 완전히 부정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수평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보면 상대를 자신보다 아래로 보고 개입을 하게 된다. 상대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고, 내가 옳고 상대는 틀렸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칭찬도 비난도 하지 말라는 말은 자녀 양육을 할때도 적용이 되어야 한다. 자녀와 나는 대등한 위치에서 자녀의 인생에 개입을 하지 않되 적극적인 지원을 하라는 것이다. 곁에서 힘이 되어 주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타인에게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을 용기 부여라고 한다. 그것만이 진정한 관계를 형성할수 있다.

자녀입장에서도 칭찬을 받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면 부모의 가치관에 맞춰 삶을 선택하게 된다.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사는 인생은 불행하다. 우리는 스스로 인생의 3대 과제인, 일의 과제, 교우의 과제, 사랑의 과제에 맞설 용기를 가져야 하겠다. .

수평관계에 근거해서 용기를 부여하는 삶이야 말로, 진정한 관계를 맺을수 있는 방법이다. 또한 타인을 평가하지 않는 것, 비난하지 않는것 , 그 대신 아무런 평가에 기대지 않은 순수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이로서 진정으로 평등한 관계를 형성할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은 감사의 말을 들었을때 타인에게 공헌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주관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 내가 속한 집단속에서 공헌하는 것을 통해 소속감을 느끼고,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느낄수 있다

다른 사람의 보살핌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은 무가치한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존재 하는 것 만으로 가치가 있다. 우리는 타인을 행위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살펴야 한다. 존재의 차원에서 감사함을 느낀다는 것은 중요하다. 위독한 상태의 어머니는 설령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도, 우리곁에서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 나에게 큰 위안이 되는 것이다.

단 한명이라도 수평적인 관계를 맺을 것. 우리 인간관계의 개선은 여기서 부터 시작이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의미에서 대등한 관계를 맺을수 있다. 그 후 생활양식에 대 전환이 일어나고, 모든 인간관계는 수평이 된다.

다섯째 상식 파괴 : 행복은 공헌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 새로운 행복의 해석

우리는 누구나 혼자 있다면 왕처럼 행동할수 있다. 하지만 타인과의 관계가 개입 되면 자연 스러운 나가 되지 못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돌리고 공동체 감각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 이 공동체 감각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이 필요하다.
우선 자기수용은 자기긍정과는 다르다, 자기 긍정은 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강하다 라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것이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다보면 자칫 우월 컴플렉스에 빠질수도 있다.우월컴플렉스란, 인맥이나, 사치품을 통해 나 자신도 그만큼 우월하다는것을 과시하려는 컴플랙스를 말한다. 반면, 자기수용은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할 수 있을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변할 수 없는 것은 받아 들이고, 변할수 있는 것은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커트 보네거트도 니버의 기도에 나오는 문구를 인용해 “신이여 바라옵건데 제게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 들이는 차분함과 바꿀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구분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라고 하였다. (차분함, 용기, 지혜)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왠지 허무주의로 느껴질수 있다. 그러나, 포기라는 말에는 명확하게 사물을 바라 보다라는 의미가 있다. 만물의 진리를 단단히 확인하는 것. 그것이 바로 포기다.

공동체감각을 이루기 위한 3가지 원칙,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 중, 두번째 원칙인 타자신뢰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는 타인에 대한 관심을 가질때 뺴놓을수 없는 것이 타자신뢰이다. 믿는다는 것은 영어의 Credit 처럼 담보의 가치를 매겨서 돈을 빌려주는 신용에 기반되어서는 안되고, 조건 없는 신뢰에 기반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믿을때 일절 조건을 달지 않는 “신뢰”를 통해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 누군가를 신뢰해봤자 배신당할 뿐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배신 할지 하지 않을지는 그 사람의 과제이다. 나는 그저 내가 어떻게 하면 될지 생각 하면 되는 것이고, 조건없이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국은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수가 없다.

이렇게, 자기수용과 타자신뢰 원칙을 지키게 되면 타인은 진정한 친구가 된다. 타인이 친구가 되면 우리는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있을 곳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있어도 좋다” 라는 소속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세번째 키워드인 “타자공헌”이 필요하다. 타인에게 무언가를 해주려는 마음, 공헌하려는 마음이 타자 공헌이다. 공동체 감각이란 자기수용과 타자신뢰만으로는 부족하고, 타인을 위한 공헌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의 최대 불행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공동체에 유익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통해서만 자신이 가치 있음을 실감한다.

이 세가지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은 하나라도 빠지면 안되는 순환구조로 연결되어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 들인다. “자기수용”을 하면 -> 배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자신뢰를 할수 있다 -> 타인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그 사람들을 친구라고 여기면 타자공헌을 할수 있다 –> 타인에게 공헌함으로서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 들일수 있다.
인간의 행복이란 바로 공헌감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공헌감이 부족하다. 인정욕구를 통해 얻은 공헌감에는 자유가 없다. 우리는 자유를 택하면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인정받지 않아도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 라고 실감할수 있다. 이 공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라고 해도 상관없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정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왜 인간은 특별해 지려고 하는 것일까, 평범한 자신을 받아 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잘하는 상태가 실패로 돌아가면, 극단적으로 특별히 못되게 구는 상태로 넘어가기도 한다. 평범해질 용기, 즉,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용기를 낼수 있다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질수 있다.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이 결코 무능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일부러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 뿐이다.
인생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하나의 점들이 연속된 것이다. 인생이란 찰라의 연속이다. 찰라의 삶에 집중하자. 산 정상을 목표로 사는 것이 아닌, “여기, 지금”을 충실히 사는 것에 집중하자. 늘 당장 내딪어야 하는 한걸음에 집중하자. 목적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에겐 현재만이 유일하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자.

여행을 예로 들어 보자. 이집트 여행은 피라미드만 도착했다가 최단거리로 돌아오는 것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까? 집에서 나온 순간, 그 자체가 여행이다. 목적지를 향하는 과정을 포함하여 모든 순간이 여행이라는 말이다. 어떤 사정이 생겨서 피라미드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해도 여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산 정상이 아닌, 등산하는 행위 자체에 목적을 둬야 한다. 산 정상에 오르고 오르지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야한다. 인생이라는 극정무대에서 서 있다고 가정해보자.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 과거와 미래가 보이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나에게만 비춘다면 바로 앞조차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 과거가 보이는것 같고 미래가 예측 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지 않기 떄문이다.

인생은 찰라의 연속이다.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은 “지금, 여기”와는 관계가 없고, 미래가 어떻게 든 간에 “지금, 여기”에서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지금 할수 있는 것을 진지하고 빈틈없이 해나가자. 목표같은 건 없어도 괜찮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하다.

아들러심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특별한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고한다. 하지만,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내 인생에 의미를 줄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자신밖에 없다.

설령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생각을 놓지 않는다면, 헤멜 필요도 없고 뭘 해도 상관이 없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며 자유롭게 살면 될 뿐이다.

누구와도 경쟁할 필요도 없다. 목적지도 필요없다. 그저 춤을 추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하게 될것이다.

[끝]
2018. 4. 2. 오전